2024. 3. 8. 18:35ㆍ에세이
내가 처음 그의 일기장을 발견한 것은 고3 때의 일이다. 당시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신기했고 또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도 나처럼 감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측은함과 냉소도 들었던 것 같다. 일기엔 온통 최선을 다하자는 말과 시시한 다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기장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긴 세월이 흐른 최근에야 우연히 발견되었다. 다시 보니 그곳에는 한 젊은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날강도 같은 세상에게 엄포를 놓고 있었지만 실상은 무력한 절규에 가까웠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중에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탐구해왔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가끔씩 그의 뇌 안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의 편도체와 전전두엽 그리고 해마는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특히 분노나 실망, 불안과 같은 감정을 느낄 때 그의 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곳에 내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마음의 병을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병이 나에게도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다. 미래에는 뇌 과학의 발전으로 뇌 탐험 프로그램이 발명될지도 모른다. 상대의 뇌와 연결해서 그가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세상을 왔다 갔다 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까?
일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뇌 탐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서 그의 32 ~35세 때 뇌를 엿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큰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그의 학창 시절과 유년 시절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대화를 통해서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일로 내가 얻은 깨달음은 오늘부터 당장 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를 포함해서 미래의 자식과 배우자를 위해서이다. 그들과 나의 뇌가 무척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상처를 서로 주고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의 뇌로 출입할 수 있도록 미리 초대장을 써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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