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하루

2024. 3. 20. 13:10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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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은 날이 있다. 꼬르륵 소리는 나지만 배는 고프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세상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인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유난히 태양이 밝았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그들은 이 순간만큼은 같은 세상에서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혼자 온 여행객처럼 골목길을 걸었다.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마다 매연 냄새가 났다. 노인들이 정자에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한 아이는 전봇대에 매달리면서 떼를 쓰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는 ‘서커스 구경이나 할까’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거리는 평화로워 보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도서관에서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에 열중해 있었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해야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걷기로 했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라서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나는 어느 아이들을 따라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한 봉사 단체가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아줌마들은 수다를 떨면서 산책을 했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관심이 반가웠다. 그렇게 걷다 보니 놀이터에 도착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벤치에 앉아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나의 오랜 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꿈속에서 오랜 시간을 방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이 순간만큼은, 어떤 사람도 될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 보니 어느 순간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다 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도서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다 보고 나서 집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거리는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걷다 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너 오늘 대체 뭘 한 거야?”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 나는 걸어 다녔고, 앉아 있었고, 밥을 먹었고, 영화를 봤다. 오늘도 무위도식이었다.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너 진짜 왜 이러냐? 이 병신 새끼야!” 숨이 점점 가빠졌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이번엔 다른 친구가 말을 걸었다. “가는 길에 과자나 왕창 사가자. 누워서 영화 보면서 먹자.” 정말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슈퍼에 들렀다. 과자를 고르고 있었는데 누군가 경고를 했다. “어리석은 선택이야. 당장 내려놔.” 나는 결국 과자를 하나만 사서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한 놈은 화를 내고, 한 놈은 생떼를 부리고, 한 놈은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했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선 다시 힘차게 걸어야 한다. 걷다 보면 목소리는 잠잠해지고 곧 고요한 침묵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면 내 눈에는 다시 이 세상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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